토론회 모습. 동물자유연대 제공.
국내에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PAI) 백신 기술이 사실상 준비돼 있는데도, 발생할 때마다 여전히 살처분에 의존하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재단법인 숲과나눔 대강당에서 동물자유연대와 살처분을 반대하는 생명들의 연대 주최로 열린 ‘HPAI 살처분에 대한 책임 있는 대안 토론회’에서 이 같은 간극이 조명됐다.
국내 대표 백신 개발 기업 바이오포아의 조선희 대표는 국내 백신 개발 현황을 “전무한 상태”가 아니라 “비상대응을 위한 준비 단계”로 규정했다. 검역본부가 미리 확보해둔 백신 후보 물질은 실험 결과 산란계와 종계(씨닭)에서 감염을 100% 막아내는 효과를 보였다. 몸속에 생긴 항체 수치도 충분히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 현재까지 가장 믿을 만한 실험 데이터를 쌓은 상태다. 민간에서 개발 중인 다른 백신 후보도 같은 방식의 실험에서 100% 방어 효과를 보였고, 그 효과가 6개월 가까이 유지됐다.
실제 농장에 바로 쓸 수 있을 만큼 준비가 앞선 백신도 두 종류 있다. 바이오포아가 개발한 백신은 이미 국내 양계 농가에서 널리 쓰이는 다른 가금병(뉴캐슬병) 백신에 AI 바이러스 유전자 일부를 끼워 넣은 방식이라, 기존에 쓰던 방식 그대로 뿌리거나 물에 타서 먹이면 되는 게 강점이다. 갓 태어난 병아리에게 이 백신을 뿌려준 뒤 실제로 AI 바이러스에 노출시키는 실험을 했더니 100% 살아남았고, 몸 밖으로 바이러스를 내뿜는 양도 크게 줄었다.
전북대와 코미팜이 함께 개발 중인 또 다른 백신은 부화하기 전 알 상태이거나 갓 태어났을 때 한 번만 맞으면 오랫동안 효과가 지속된다는 게 특징이다.
다만 한계도 있다. 백신과 똑같거나 아주 비슷한 종류의 바이러스에는 100% 가까운 효과를 보였지만, 조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가 유행할 경우 방어율이 산란계에서 약 70%, 종계에서 62~75% 정도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조 대표는 이를 백신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지금 유행하는 바이러스와 백신에 쓰인 바이러스가 얼마나 비슷한지가 중요한 문제이며, 유행 상황에 맞춰 백신 재료를 계속 업데이트하는 체계를 갖추는 게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기술은 준비돼 있지만, 정작 정부 규정상 접종 자체가 막혀 있다는 점이 더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됐다. 이누리 동물자유연대 정책팀장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가 정한 방역 규정에는 병이 퍼지기 전 미리 접종하는 ‘예방접종’은 아예 금지돼 있고, 병이 이미 퍼진 뒤 급하게 놓는 ‘긴급접종’조차 여러 정부 부처의 협의를 거쳐야만 실행할 수 있게 돼 있다. 그 결과 2003년 국내에서 AI가 처음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예방접종이든 긴급접종이든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다. 이 팀장은 이를 “백신을 만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부가 계속 망설이기만 한 결과”라고 짚었다.
정부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로는 세 가지가 꼽힌다. 첫째, AI는 사람에게도 옮길 수 있는 병인데, 백신을 맞은 닭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몸속에 바이러스를 지니고 배출할 경우 사람에게 옮을 위험을 늘릴 수 있다는 우려다. 둘째, 백신을 맞혀도 완전히 막지 못하면 오히려 병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상태(풍토병)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셋째, 백신을 쓰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AI 청정국’ 지위를 잃게 되고, 그러면 중국산 닭고기 수입을 거부할 명분도 함께 사라진다는 무역상의 우려다.
이에 대해 발제를 맡은 세레나 마라니노 산안마을 대표는 해외 사례를 들어 반박했다. 국제기구인 세계동물보건기구(WOAH)와 유럽식품안전청(EFSA)은 이제 백신 접종을 살처분 등 기존 방역 조치를 보완하는 핵심 수단으로 인정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20년 넘게 평소에도 꾸준히 백신을 접종해왔고, 그 결과 한때 한 해 700명 넘게 감염됐던 AI의 사람 감염 사례를 2019년 이후 사실상 없앴다. 프랑스는 2023년 10월부터 오리에 예방접종을 시작한 뒤 AI 발생 건수가 이전 396건에서 10건으로 크게 줄었다고 보고했다. 다만 프랑스는 고기용 오리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국내 AI 피해의 93%는 알을 낳는 산란계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사육 방식이 달라 단순 비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편 이날 발표에서는 AI가 이미 ‘풍토병’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예전에는 3~4년에 한 번 겨울에만 발생했는데, 최근엔 매년 발생하고 시기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로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 팀장은 “이는 병을 아예 뿌리 뽑겠다는 목표를 전제로 한 살처분 정책 자체의 근거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으로, 이제는 병을 뿌리 뽑기보다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