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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맛보기 글 - 100년 전 지킬섬의 마녀 잔치 2010/11/19 13:47
정글북

지킬섬의 마녀 잔치

 

미국 역사상 가장 웅장한 계획을 뚝딱 만들어낸 마녀 잔치는 지킬섬에서 벌어졌다. 지킬섬은 조지아 앞바다에 있는 J.P.모건 소유의 땅이었다.

 

잔치는 1910년에 로드아일랜드의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주최했다. 그는 모건의 사업 동반자이자 존 D.(2세) 록펠러의 장인이었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올드리치는 월스트리트 상원의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대기업과 은행의 대변자였다.

 

올드리치가 모임을 주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폴워버그라는 독일계 이민자였다. 그는 로스차일드가 남북전쟁 이후 미국 내의 주요 금융업체로 삼고 있던 쿤.로브의 공동 경영자였다. 다른 참석자로는 당시 모건의 뱅커스트러스트사 회장으로 있던 벤저민 스트롱과 다른 두 모건계 은행장, 미국 재무부차관보, 당시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은행었던 내셔널시티뱅크(지금은 시티뱅크로 불린다)의 프랭크 밴덜립 행장 등이었다. 밴덜립은 윌리엄 록펠러와 쿤.로브를 대표했다.

 

모건은 계획 막후의 최고 운영자였고, 모건과 록펠러 패거리는 오랫동안 최대의 맞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되는 금융체계를 짜내기 위해 이 비밀 회동에 모였다. 밴덜립은 나중에 이 모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차역으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 거기에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의 개인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 우리 특별 그룹이 금융 법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드러나면 그 법안은 의회를 통과할 기회를 도무지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 올드리치의 중앙은행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 핵심 부분은 나중에 채택된 계획에 포함됐다.

 

(그 3년 전에 발생했던) 1907년의 공황은 니커보커 은행과 아메리카트러스트사가 파산할 지경이라는 소문으로 촉발됐다. 모건하우스가 소문의 진원지였다는 증거는 나중에야 나왔다. 소문을 믿은 대중은 인출사태를 일으켜 소문을 현실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러자 모건은 점잖게 공황을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인출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럽에서 1억 달러어치의 금을 들여온 것이다. 여기에 홀린 대중은 앞으로 공황을 없게 하려면 중앙은행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됐다. 올드리치안을 공동 발의한 로버트 오웬스는 나중에 의회에서, 금융업계가 자기네들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을 요구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기 위해 그러한 금융 공황 유발을 모의했다고 증언했다.

 

1907년의 공황으로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의회조사단이 구성됐고, 지킬섬 비밀 회합이 이어졌다. 그 결과 ‘올드리치안’이라 불린 법안이 만들어졌으나, 조심스런 반대파는 그것을 간파하고 효과적으로 물리쳤다. 브라이언은 민간 화폐를 민간 은행에서 발행하도록 하는 어떤 법안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화폐는 정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국가 통화가 돼야 한다.”

 

모건에게는 의회의 반대말고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 법안에 서명하겠다는 대통령이 필요했다. 1910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모건의 똘마니가 아니었다. 매킨리의 뒤는 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이어받았는데, 그는 모건 진영에 있었고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를 해체하는 데 관여했다.

 

루즈벨트의 후임인 태프트는 공화당 소속이고 록펠러의 본거지인 오하이오주 출신이었다. 그는 인터내셔널 하비스트와 US스틸 등 모건의 주요 트러스트를 해체하기 위해 반트러스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복수를 했다. 태프트의 1912년 재선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의 대통령 유임을 막기 위해 모건은 침착하게 진보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은퇴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불러내 후보로 출마케 했다.

 

루즈벨트는 태프트의  표를 충분히 잠식했고, 모건의 진짜 후보인 윌슨 민주당 후보가 1912년 선거에서 당선됐다. 루즈벨트는 속았음을 깨닫고 떠나갔고, 진보당은 해체됐다. 윌슨은 에드워드 멘델 하우스 대령 등 모건 똘마니들에게 둘러싸였다. 하우스 대령은 백악관에 집무실도 가지고 있었다. 윌슨은 하우스를 ‘분신’이라 불렀다.

 

이들 패거리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올드리치법안’의 이름을 ‘연밥준비법’으로 바꾸고 성탄절 사흘 전에 상정했다. 의회는 성탄절부터 연휴를 떠나도록 예정돼 있었다. 법안은 문구가 아주 애매해서 아무도 그 조항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국가 통화는 합중국 조폐국에서 찍지만, 그것은 정부의 부채로서 발행되는 것이었다. 민간은행인 연방준비은행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빚이었다.

 

법안은 1913년 12월 22일 통과됐고, 윌슨 대통령은 이튿날 이를 서명해 발효시켰다.

.............

 

1913년의 연방준비법은 국제 은행가들에게 중요한 성과였다. 그들은 민간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한 세기 넘게 싸워왔다. 이 중앙은행은 정부 부채를 ‘화폐화’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가진 은행이었다. 이 법은 ‘연방준비은행들의 설립을 규정하고, 탄력적인 통화를 갖추며, 상업어음 재할인 수단을 제공하고, 미국 금융에 대한 효율적인 감독 체계를 수립하며, 그 밖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페드스피크(FedSpeak)의 시작이었다. 페드스피크는 모호함 속에 논점을 감추는 연방준비은행의 독특하고 추상적인 어법을 가리키는 용어다. 예컨대 앞에서 인용한 ‘탄력적인 통화’는 은행이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대출금을 의미한다. ‘재할인’은 미불 대출금을 만기 전에 재대출함으로써 은행이 자금을 요술이라도 부리듯이 뻥튀기하는 기술이다. ... 린드버그 의원은 이 법을 ‘당대 최악의 입법 범죄’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특혜다. 과거에 존재했던 정부가 일부 특권층의 손에 쥐어주었던 어떤 특혜보다도 뛰어나다. ... 금융시스템은 완전히 모리배 집단에게 넘어갔다. 이 시스템은 민간의 것이고, 남의 돈을 이용함으로써 생기는 이득을 가능한 한 최대로 늘린다는 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운용되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와 사상 최대의 금융권력 J.P.모건

 

강탈영주는 많았지만, 패거리의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J.P.모건과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존 D. 록펠러였다. 모건은 금융을 지배하고, 카네기는 철강을 지배했으며, 록펠러는 석유를 독점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의 금융 및 기업구조는 모건의 금융.수송회사와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에 의해 지배됐다. 그리고 이들 복합기업은 그들끼리 긴밀한 동맹을 맺었다. 겸직임원제를 통해 그들은 미국의 경제조직 거의 전부를 지배했다. ...

 

월스트리트 23번가에 위치한 모건의 은행은 ‘모건 하우스’로 알려졌는데, 수십 년 동안 미국 금융의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1920년에 폭탄이 이 은행 앞에서 터져 40명이 죽고 400명이 다쳤다. (나중에 이 미국 금융의 중심은 세계무역센터로 옮겨갔는데, 2001년에 또 다른 비극적인 공격의 표적으로 선택됐다)

 

20세기 초에 모건은 월스트리트의 신디케이트를 지배했다. 금융저술가 존 무디는 이를 ‘세계 사상 최대의 금융권력’이라고 불렀다. 모건은 22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100여 개의 법인을 지배했다.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1913년 <은행가는 어떻게 남의 돈을 쓰는가>라는 책에서 미국 경제에 가장 큰 위협은 ‘금융 트러스트’라고 썼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금융 트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힘센 은행을 세운 J.P.모건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영국의 로스차일드처럼 모건은 미국에서 비상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다. 모건의 똘마니가 통상적으로 국제 금융 회의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랫동안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를 그 자리에 지명하기 전에 J.P.모건의 법인 이사였다.

 

모건과 다른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자금을 받은 행운의 기업들은 자기 산업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이 모든 합병이나 취득에 꿔줄 돈이 어디서 났을까? 해답은 라이트 패트먼 의원 및 다른 세심한 관찰자들이 내놓았다.

 

강탈영주들은 빈 모자에서 돈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은행들은 결정적인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장부 기입’이라는 바닥 없는 원천에서 나온 돈을 계열 법인들에 ‘빌려’주는 것이다. 그런 뒤에 이 자금은 경쟁사들을 사들이고, 시장을 독점하며, 정치가들에게 기부하고, 의회에 로비하며, 여론을 조작하는데 쓰였다.

 

록펠러와 모건은 정치 무대에서 권력을 다툰 적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강력한 영국 금융업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록펠러는 체이스은행을 사들였는데, 그 자금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스차일드가로 연결된다. ... 1955년 록펠러의 체이스은행은 맨허튼사와 합병해 체이스맨허튼은행이 됐다.

 

모건가의 금융회사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50년대에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은 나중에 피바디 모건사가 되는 회사의 공동경영자가 됐다. 영국과 미국 사이의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런던의 투자회사였다. 남북전쟁 때 이 회사는 북부연합의 최고 재무대리인이 됐다. 주니어스의 아들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나중에 이 회사의 뉴욕 지점장이 됐다. 이 회사는 1895년에 ‘J.P.모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873년, 1884년, 1893년, 1907년의 금융 공황에서, 다른 은행들은 망해 나갔지만 모건의 은행은 언제나 어떻게든 자금을 구하고 살아남아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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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준비은행은 독립 조직으로, 민간이 소유한 법인이다. 이는 열두 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들로 구성되며, 이 지역 연방준비은행들은 여러 회원 상업은행들이 소유한다. 12개 연방준비은행 가운데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전체 연방준비은행 지분의 53%를 소유하고 있으며, 연방 재무부의 재무대리인으로 지정되어있다. 이 특권적 민간 은행의 최대 주주는 뉴욕 지구의 거대 상업은행들이다.

 

1997년에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그 3대 회원 은행이 체이스맨허튼은행, 시티뱅크, 모건보증신탁이라고 밝혔다. 2000년에 J.P.모건과 체이스맨허튼이 합병해 J.P.모건체이스가 됐다. ... 2004년 J.P.모건체이스는 뱅크원을 인수해 시티그룹(자산 1조2천억 달러) 다음으로 큰 은행이 됐다. 시티그룹은 록펠러 제국의 초석이다. ...

 

이렇게 록펠러와 모건 제국의 금융 토대인 시티뱅크와 J.P.모건체이스는 미국의 뉴욕 연방은행의 양대 주주다. 연방준비제도는 그것을 고안한 강탈영주들의 통제 하에 확실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워싱턴의 중앙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재무부 장관과 통화감독관이 참여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이사회는 열두개 지역 연방준비은행에 대한 통제권이 별로 없다. 그들은 대개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선도에 따른다. 그러므로 연방준비제도의 진짜 권력은 거기에 집중돼 있다.

 

지킬섬 회동 참석자들 중 한 사람인 벤저민 스트롱이 초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됐다. 스토롱은 런던의 금융권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의 이력은 모건 은행의 호의에 기댄 것이었다.

 

 

*출처: 달러(The Web of Debt) - Ellen Hodgson Brown저, AK(도서출판 이른아침)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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